영화인들에게 보내는
호소문
영화진흥위원회가 또 다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시작은 강한섭 위원장입니다.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영화진흥을 위해 노력해야 할 영화진흥위원회가 진흥사업의 장(場)이 아닌 사건·사고의 격전지가 된 것 같아 영화인들에게 송구스럽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지난 2008년 5월, 강한섭 위원장이 취임한 이후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습니다. '한국영화 대공황 발언' 등 말실수가 끊이지 않았고, 철 지난 색깔 논쟁으로 영화계 편을 가르기도 했습니다. 언론에 '벌컥 강한섭'이란 표현이 오르내렸습니다. 이와 같은 위원장의 태도로 영화진흥위원회의 위신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위원장의 이와 같은 '얼치기 태도'에 있지 않습니다. 취임 1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영화인들에게 '4기 위원회의 영화산업진흥 정책' 밑그림조차 내놓지 못한 그의 자질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지난 10개월 동안 영진위 직원들은 위기에 빠진 한국영화계를 위해 새로운 진흥사업을 개발하고 업무에 매진하는 대신, 강한섭 위원장이 벌여놓은 사건·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습니다.
강한섭 위원장의 독단적인 일처리는 영진위의 의사결정 과정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 최고의결 기구인 9인 위원회는 최근 논란이 된 독립영화 지원 축소나 시네마테크 공모제 시행 등과 같은 중요 사안들을 위원장이나 사무국이 아닌 언론을 통해 먼저 접하고 있습니다. 영화산업진흥 중장기 계획을 마련한다 하고서도 마감 시일이 임박해서야 위원회를 소집해 의견을 묻는 요식 행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9인 위원회는 이런 상황에 대한 공개 질의서를 강한섭 위원장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번 노조와의 갈등은 영화진흥위원회 영상산업정책연구소 계약직 직원들에 대한 사측의 일방적인 해고 통지로 촉발되었습니다. 영상산업정책연구소는 지금과 같이 급변하는 매체 환경과 경제 위기 상황에서 한국영화의 현실을 분석하고, 정책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부서입니다. 그리고 현재 해고 통지를 받은 직원들은 정책연구소의 핵심 인력들입니다. 영비법을 비롯한 각종 법률적 문제를 다루는 연구원과 영진위의 유일한 다양성·문화정책 연구자, 현재 진행 중인 영화산업 중장기 계획의 핵심 키를 쥐고 있는 연구원입니다. 그동안 강한섭 위원장은 영화 정책 생산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정책연구소 연구직의 고용 안정을 보장해 영화 정책 생산과 논의를 보다 생산적이고 안정적으로 하겠다고 주장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정당한 인사평가조차 받지 못하고 한순간에 업무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2007년과 2008년 KPI 평가에서 해당 팀을 우수팀으로 이끌고, 영진위 역사상 계약직으로는 처음으로 우수사원으로 선발된 직원들이 왜 정당한 평가 절차도 받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지 그들과 함께 일해 온 저희들로서는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의 업무 능력을 평가해야 할 인사위원회가 열리기도 전, 강한섭 위원장은 전원 해고를 선언했고 사무국장은 인사위원들을 미리 불러 전원 해고로 의결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화진흥위원회의 정책 개발과 연구 기능은 마비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정책연구소의 연구원 10명 가운데 5명이 해고 대상자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영화인들이 보시기에 이는 단순한 영화진흥위원회 내부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경제 침체로 불황을 거듭하고 있는 이 시기에 공기관 직원들의 일자리 지키기로 비쳐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난 10개월간 강한섭 위원장의 새로운 '이너서클'을 보아온 저희들로서는 위원장의 이와 같은 처사가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강한섭 위원장은 그동안 적절한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한 인사에게 친분을 이유로 직함을 만들어줬고, 영진위에서 진행하는 수많은 자문회의에 측근 인사를 전문성과 관계없이 배치시켰습니다. 영진위 아래에서 새로운 저널을 창간하겠다며 온·오프라인 특위를 구성했지만 그 어떤 성과도 없이 특위에게 회의비만 지불하는 과오를 겪었습니다. 정책연구소 연구원들을 일방적으로 해고한 것에 대해 반발하고, 의심을 품는 것은 바로 이런 지난날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진흥사업 방향을 결정하고, 영화산업 선진화를 위한 기본이 되는 산업 기초 조사·연구를 통해 영화산업 정책을 생산하는 영진위 핵심부서가 위원장의 측근으로 채워질지도 모를 상황을 저희는 두 손 놓고 지켜볼 수 없습니다.
2009년 3월은 영화산업 정책 마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2010년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향후 5년간의 중장기 사업계획을 마련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의 결정이 향후 5년간의 영화정책과 방향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10년 후의 한국 영화산업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취임 10개월이 지나도록 단발성, 전시성 사업만을 공표했을 뿐 어떠한 마스터 플랜도 내놓지 못한 것은 물론 영화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는커녕, 아직도 재야 교수 시절 모 잡지에 기고했던 기사를 인용하며 현실성 없는 탁상공론을 되풀이하고 있는 강한섭 위원장을 더 이상 지켜보기 힘듭니다. 또한 부임 7개월 동안 업무 파악도 채 끝내지 못해 영진위 내부는 물론 대외의 공식적인 자리에서까지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김병재 사무국장 역시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영화인 모두에게 지금은 참으로 힘든 시절입니다. 때문에 영화진흥위원회의 오늘과 같은 혼란을 바라보는 영화인들이 시선이 곱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을 품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지난 10개월간 온몸으로 겪으며 깨닫게 됐습니다. 한국영화를 위해, 한국 영화인을 위해 발로 뛰고, 현장에서 고민하며, 치열히 토론하는 영화진흥위원장과 사무국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퇴진'을 통해서라도 더 늦기 전에 이를 바로잡고 싶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 전 직원은 영화진흥위원회가 하루빨리 정상화되기를 희망합니다. 영화계를 위해 좀 더 열심히 일하고, 치열하게 고민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영화인 여러분 모두 저희 '희망'의 편에 서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9년 3월 24일 영화진흥위원회 조합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