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목이 <시체(the body)>인 이 영화는 구성에서 아주 흥미롭다. 주인공이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는 행위를 통해 회상이 시작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것은 유년 시절 친구들과 겪은 모험담이다. 그 모험 또한 어떤 소년의 '죽음'을 계기로 시작된다. 죽은 소년의 시체를 찾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때문에 관객은 주인공과 함께 '죽은 자'에 대한 기억과 흔적을 따라 현재와 과거를 아우른다.
그런데 이 영화가 신경 써서 배치하고 있는 '죽음'이라는 의미가 무엇일까 고민해 보자. <스탠 바이 미>에서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선 이 영화가 은유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춘기-성 정체성과 변화의 시간
'성장영화' 인데도 <스탠 바이 미>에는 그 시절 또래 아이들이 겪었을 연애담 따윈 등장 하지 않는다. 아니, 아예 비중 있는 배역의 여자 아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여배우의 모습은 가게 점원과 어머니, 단역배우 정도의 주변인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심지어 영화가 끝날 무렵 등장하는 가족의 모습에서도 어머니(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보통의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남녀 등장인물의 성비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맞춰주기 마련이다. 한쪽의 성별만 일방적으로 나올 경우, 어쩔 수 없이 경직된 분위기를 연출하거나 동성애적 버디 무디로 흘러가며 다수의 취향과는 멀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내일을 향해 쏴라>같은 영화들이 있긴 하지만 그러한 작품들은 태생적으로 서부처럼 특수한 공간이나 시대적 배경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왜, <스탠 바이 미>는 이 모양인가. 물론 아이들이 주로 나오는 영화니 내 생각이 너무 과하다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20세기 소년은 왜 켄지 일행 중에 여자애가 끼어들었을까?
솔직히 말하자. <스탠 바이 미>는 소년들의 동성애를 다루는 영화다. 이미 눈치 채신 분들 있으실 거다. 이 작품에 성적인 암시와 은유가 흘러넘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스크린을 지배하는 소년들의 외모와 그들의 여행에 녹아있는 동성애 코드들을 보라. 어린 고디는 흡사 '낸시 보이'처럼 곱상한 외모와 여성성을 드러내는 조신한 언행을 보여준다. 그와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깊은 시선을 나누는 크리스 역의 리버 피닉스 또한 섬세함을 간직하고 있긴 마찬가지.
여기서 잠깐. 호주 출신 여성 운동가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인 중의 한 명으로 선정된 바 있는 저메인 그리어 교수의 지적을 떠올려 보자. 그녀가 자신의 책 <아름다운 소년 (The Boy)>에서 지적한 것처럼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은 소년의 몸은 여성성을 지니고 있으며 때로는 진짜 여자보다도 더 아름답다(이 책에는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미소년들의 그림과 사진들이 예시로 제시되는데 성별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다). 더군다나 이미 20대가 되어서도 여자보다 더 예쁜 꽃미남들이 많지 않은가.
그런데 소년들이 질퍽거리는 늪을 지나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나? 더럽고 끈적이는 것에 육체를 담그고 나서 그들이 발견하는 것은 피를 빠는 거머리다. 여기서 늪을 지나는 통과 의례는 성적인 코드를 반영하고 있다. 호기심과 설렘이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발견해서 놀라움과 당혹감을 느끼고 경악으로 바뀌면서 환상이 깨지는 과정. 그것을 통과하는 도중에 소년들의 쾌감과 기쁨 또한 그려진다. 주목할 것은 그 후에 소년들의 육체가 피를 흘린다는 사실. 더군다나 고디의 경우에는 팬티 속으로 들어간 거머리 때문에 중요한 부분에 피를 보게 된다. 이것은 그야말로 첫 생리를 상징하는 장치다. 때문에 소년들이 이러한 여정을 통해 성장한다는 내용은 인생에 있어서 또 다른 탄생인 '2차 성징'을 의미하고 있다.
더불어 초경을 반영하듯 피를 흘린 고디의 경우 여성스러운 정체성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성인이 된 고디, 즉 이야기를 회상하는 인물은 보통의 평범한 남성으로 비춰지고 있다. 왜 그럴까?
이것은 2차 성징 후 소년들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환경의 힘에 굴복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소년들 중 일부는 가난과 열악한 환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크리스와 고디 또한 서로 떨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성인인 고디가 가장 가까웠던 크리스의 죽음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
작품 속 죽음의 다중적 의미
이것을 알기 위해선 이야기의 절정에 놓인 '죽음'의 이미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스탠 바이 미>는 사춘기 시절의 성적인 체험과 변화를 은유하며 성장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소년들이 찾아나선 시체를 통해 부각되는 죽음이란 것 또한 필연적으로 섹스와 겹치는 이미지이다. 행위 후의 '사정'이 나타내는 상실감과 생명력의 소멸이 그것을 나타낸다. 반면 씨앗을 뿌린다는 의미에서는 또 다른 탄생, 영화 속에서 '2차 성징'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죽음'이라는 것이 현재에서 과거를 화상하게 하는 장치로 쓰일 경우 의미는 또 달라진다. 성인이 된 고디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그리움의 정서를 반영하는 부분인데 이것은 결국 아쉬움을 나타낸다. 무엇에 대한? 바로 크리스와의 관계에 대한 아쉬움이다. 유년 시절 동성애 관계에 놓인 두 사람이 결국 떨어져 살다가 다른 한 사람이 상대의 사망 소식을 신문으로 접하게 되는 비극.
이 때문에 이야기 초반에 회상을 이끌어내는 '죽음'이라는 장치는 이뤄지지 못한 관계에 대한 아쉬움을 반영한다. 동시에 결말에서 고디의 행동, 즉 컴퓨터를 통해 과거를 정리하는 행위는 지나간 사랑의 기억을 간직하려는 행동이기도 하다. 이것이 결국 (아마도 대중에게 출판될)원고에서는 성장기 소년들의 우정 어린 추억으로 정리되는 셈이다.
상대의 죽음으로 인해 이제 기억을 간직하며 살아갈 사람은 고디만 남게 된 현실. 때문에 고디가 원고를 정리하는 마지막 행동은 담담하게 현실에 순응하면서도 사랑했던 존재를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죽어버린 사랑에 이별을 고하고 또 그 기억의 진실을 숨겨진 상징들을 통해 가슴에 묻는다. 영화 속 죽음에 대한 다중적인 의미들은 그렇게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