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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trend report]/영화

연장된 세기말 정서, 인류위기 해법 찾는 헐리웃

 
  
리메이크 V 포스터.
ⓒ ABC/채널 CGV
 

1980년대, 영화에 버금가는 완성도로 시청자들에게 소름끼치는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미국 드라마 <V>가 다시 리메이크 되어 국내에서도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지난 2일 첫 방송된 <리메이크 V>는 국내 방송된 역대 미드 가운데 첫 시즌 1회에서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원작의 감독이 시나리오에 참여하고 있지만, <리메이크 V>는 무언가 달라진 모습을 선보인다.

진일보된 특수효과와 스케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에 깔린 시각 자체가 변한 듯하다. 원작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들(Visitors)이 인류를 희생시킬(Victim) 음모를 감추고 있으며, 이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저항군을 만들어 승리(Victory)를 위해 싸운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리메이크 V>에서 외계인들은 오래전부터 인류 사이에 숨어 지내며 기회를 노린다. 그리고 마침내 도심 상공을 뒤덮는 거대 우주선들의 출현과 함께 그들의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바뀐 것일까. 원작이 방영된 1983년 당시와 지금의 시대가 변했고 시청자들의 의식도 변했기 때문이다. 무수한 외계인침공 영화들에 영감을 제공한 잭 피니 소설 <바디 스내처>의 영향을 간직한 원작은, 미국사회를 혼돈과 비이성의 시기로 몰아넣었던 메카시즘 공포를 반영했다. 극중에서 갑자기 나타난 외계인 캐릭터들은 시청자들의 잠재의식 가운데 자리 잡은 공산주의와 변화에 대한 경험적, 예측적 공포를 활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또 다시 상황이 변했다. 공산주의나 파시즘 따위는 이미 지난 역사가 되었고 급변하는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할 만큼 사람들은 정보에 익숙하다. 더불어 의식도 그만큼 성장했다. 때문인지 911 사태를 언급하며 시작하는 <리메이크 V>에서는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대립과 분열의 원흉으로 정치, 군사, 종교계 곳곳을 지목한다. 극중 외계인들은 이러한 조직들 가운데 정체를 숨기고 포진해 있다. 실제로 첫 시즌 1회에서는 테러리스트와 FBI 요원이 나란히 외계인으로 등장한다. 
 

 
  
극중 외계인 지도자로 인간들과 만나는 안나.
ⓒ abc
 



이렇듯 상징하는 대상이 여기저기 퍼져 있다는 것은 사회적인 혼란을 반영한다. 결국 <리메이크 V>에서는 외계인의 공포가 테러와 결합하여 부시정권의 역사 자체로 귀결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평화와 화합이라는 테마에 접근하는 시각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아마도 실패한 보수 강경주의 노선이 만들어낸 폐해가 미국사회를 좀먹은 현실을 풍자하는 것이 아닐까.


원작에서 비중이 그리 크지 않던 가톨릭 신부가 초반부터 등장하며 종교에 대한 철학적이고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려는 움직임도 주목된다. 과연 새롭게 리메이크 되는 <V>는 얼마만큼 도전적인 자세로 진보적인 물음들을 담아낼 수 있을까. 그런데 특이한 점은 최근 들어 테마의 중심에 이런 진보적인 시각이나 질문들을 깔고 있는 작품들이 많이 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데이브레이커스> 포스터.
ⓒ 성원 아이컴

극장으로 눈을 돌리면 세기말도 아닌데 암울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얼마 전 개봉한 <데이브레이커스>를 보자.

진보적 성향이 뚜렷한 배우인 에단 호크와 윌리엄 데포가 출연했다는 점에서부터 눈길을 끄는 이 영화는 대부분의 인류가 흡혈귀로 변한 세상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비슷한 설정의 영화 <나는 전설이다>가 <셔터 아일랜드>와 더불어 다수와 소수의 권리문제에서 오는 딜레마를 다뤘다면, 이 작품은 더 나아가 공동체에서 근본적으로 지켜야할 가치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더군다나 <데이브레이커스>는 두 작품들과는 다르게 주제를 선명히 하면서도 은유는 매우 쉽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장점을 지닌다.

흡혈귀들이 유지하는 사회는 인간성을 상실한 주체들에 의해 굴러가는 괴물 도시다. 더욱이 브람 스토커가 제시한 흡혈귀의 원형을 21세기 디스토피아의 상상력과 뒤섞은 장면들은 상당히 인상적이며 감각적인 비주얼은 주목할 만하다.




작품의 배경 안에는 자원의 고갈을 의미하는 인간 혈액 감소라는 문제가 골치를 썩이고 있고, 이를 독점해 부를 창출하려는 기업권력과 빈부격차가 존재한다. 흡혈귀를 인간으로 되돌리고, 탐욕으로 마비되어가는 문명을 되살리고자 분투하는 주인공들이 꿈꾸는 것은 말 그대로 '사람 사는 세상'이자 지속 가능한 사회다. 그들은 결국 그 해답인 '치료제'를 발견하면서 영화가 끝나는데 매우 생각해볼 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더군다나 보수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응용해 진보적 메시지를 이끌어낸 점은 이 작품의 또 다른 묘미다.


곧 개봉하는 덴젤 워싱톤과 게리 올드만 주연의 <일라이>역시 대립구도와 갈등에서 비슷한 점들을 가지고 있다. 암울한 미래의 한정된 자원과 이를 둘러싼 대립, 권력의 지배와 저항 등. 세기말도 아닌 지금, 시대상과 배경에서 위기를 전제로 한 작품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샘 레이미 감독이 <드래그 미 투 헬>에서 은유했듯 자본주의 논리가 극에 달한 사회의 모습이 지옥으로 전락해 버려서라면 너무 극단적인 발언일까. 하지만 결국 이 작품들은 인간성의 성찰과 함께 공동체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