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러진 화살’을 연출한 정지영 감독의 차기작 ‘남영동 1985’가 대선을 앞둔 올 11월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남영동 1985’는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실화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김 전 고문은 대학교 3학년 때인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교내 시위에 참가했다가 강제로 징집 당한 후 1970년 복학했다. 이 때부터 교련반대 등 학내 시위를 주도하던 그에게 공안당국은 ‘서울대생 국가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해 주모자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하기에 이른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김 전 고문은 수배자가 된 채 가족과 친구와도 마음 놓고 연락을 취할 수 없는 긴 도피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1979년 박정희 정권이 끝날 때가지 숨어 있어야 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박근혜 인혁당 사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시작된 폭행과 고문은 무려 22일 동안이나 지속됐고 그 상흔으로 김 전 의원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받아야 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글로 읽어도 처참한 내용, 영화가 고발한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본인은 1985년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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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13일 금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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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박근혜 인혁당 사건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 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 그 다음에 9월 20일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9월 25일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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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이것은 1985년 12월 19일 서울형사지방법원 118호 법정, 서울형사지법 합의 11부(재판장 서성, 배석 김희근, 여상훈) 심리에서 당시 김 전 고문이 진술했던 내용이다. 진술 도중에도 어지러운 듯 말을 중단하거나 난간을 붙들면서 쉬기를 반복했던 그는 1988년까지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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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1985, 박근혜가 꼭 봐야할 영화
박근혜 인혁당 사건
영화 ‘남영동 1985’는 인간 김근태의 삶에서 지워지지 않는 후유증을 남긴 22일 간의 고문을 폭로한다. 글로 읽어도 처참한 내용을 영화는 치가 떨릴 정도의 사실감으로 수십 분 이상 화면에 담아낸다. 영화의 90%가 대공분실에서 진행될 정도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감독은 “고문이 얼마나, 어떻게 우리네 인간의 영혼을 파괴시킬 수 있는지” 정공법으로 보여준다. 국가가 국민을 억압하고 통치하기 위해 저지른 만행에 대한 고발이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한편 김근태 전 고문이 타계한 지난해 12월 30일, 당시 박근혜 위원장 주재로 열린 한나라당 비대위 회의에서는 어느 누구도 김 전 고문의 타계에 조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참다못한 기자들이 회의가 끝난 후 질문을 던지자 “깊은 조의를 표하고 명복을 빌겠습니다”라고 짧게 한 마디 했을 뿐이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헌정 질서를 파괴한 박정희의 독재에 대해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거나 ,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또한 역사상 최악의 사법살인으로 평가 받는 인혁당 사건을 정당화 시키려는 태도가 국민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박근혜 인혁당 사건
‘남영동 1985’는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실화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김 전 고문은 대학교 3학년 때인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교내 시위에 참가했다가 강제로 징집 당한 후 1970년 복학했다. 이 때부터 교련반대 등 학내 시위를 주도하던 그에게 공안당국은 ‘서울대생 국가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해 주모자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하기에 이른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김 전 고문은 수배자가 된 채 가족과 친구와도 마음 놓고 연락을 취할 수 없는 긴 도피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1979년 박정희 정권이 끝날 때가지 숨어 있어야 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영화 ‘남영동 1985’ 스틸 컷. 김근태 역은 ‘부러진 화살’에서 변호사로 나왔던 배우 박원상이 맡았으며,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을 표현한 이두한 역은 이경영이 맡았다. 출처: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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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시작된 폭행과 고문은 무려 22일 동안이나 지속됐고 그 상흔으로 김 전 의원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받아야 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글로 읽어도 처참한 내용, 영화가 고발한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본인은 1985년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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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영동 1985’ 스틸 컷. 출처 : 다음 영화
박근혜 인혁당 사건
이러한 과정에서
박근혜 인혁당 사건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13일 금요일입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박근혜 인혁당 사건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 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 그 다음에 9월 20일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9월 25일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중략)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영화 ‘남영동 1985’ 스틸 컷. 출처 : 다음 영화
박근혜 인혁당 사건
박근혜 인혁당 사건
이것은 1985년 12월 19일 서울형사지방법원 118호 법정, 서울형사지법 합의 11부(재판장 서성, 배석 김희근, 여상훈) 심리에서 당시 김 전 고문이 진술했던 내용이다. 진술 도중에도 어지러운 듯 말을 중단하거나 난간을 붙들면서 쉬기를 반복했던 그는 1988년까지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남영동 1985, 박근혜가 꼭 봐야할 영화
박근혜 인혁당 사건
영화 ‘남영동 1985’는 인간 김근태의 삶에서 지워지지 않는 후유증을 남긴 22일 간의 고문을 폭로한다. 글로 읽어도 처참한 내용을 영화는 치가 떨릴 정도의 사실감으로 수십 분 이상 화면에 담아낸다. 영화의 90%가 대공분실에서 진행될 정도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감독은 “고문이 얼마나, 어떻게 우리네 인간의 영혼을 파괴시킬 수 있는지” 정공법으로 보여준다. 국가가 국민을 억압하고 통치하기 위해 저지른 만행에 대한 고발이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한편 김근태 전 고문이 타계한 지난해 12월 30일, 당시 박근혜 위원장 주재로 열린 한나라당 비대위 회의에서는 어느 누구도 김 전 고문의 타계에 조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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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전 고문 타계 후 하루가 지나서야 빈소를 찾은 박근혜 당시 한나라 위원장의 표정.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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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못한 기자들이 회의가 끝난 후 질문을 던지자 “깊은 조의를 표하고 명복을 빌겠습니다”라고 짧게 한 마디 했을 뿐이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헌정 질서를 파괴한 박정희의 독재에 대해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거나 ,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또한 역사상 최악의 사법살인으로 평가 받는 인혁당 사건을 정당화 시키려는 태도가 국민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박근혜 인혁당 사건
2004년 8월 전두환 씨 자택을 방문한 박근혜 현 새누리당 대선 후보. 10.26 사태 직후 박 후보는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으로부터 6억 원을 받기도 했다. 출처 : 시사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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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합당은 박 후보에 대해 “5·16 쿠데타가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나, 판결 18시간 만에 무고한 사람을 살인한 정권의 부당한 행위를 옹호하는 것은 대통령 후보로서 아예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남영동 1985’가 개봉하면 박 후보는 이 영화에 대한 관람이 필요할 것 같다. 물론 표를 얻기 위한 수단인지, 진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반성하는지 여부는 본인만 알 수 있다. 하지만 대중에게 보여주기엔 좋은 소재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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