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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trend report]/영화

영화 해프닝 (The Happening, 2008)의 결말 - 멸망의 초읽기


 

지구 종말과 생존자들은 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다. 히치콕의 후예인 샤말란 감독의 해프닝도 인류 종말현상을 소재로 했는데 섬뜩한 것은 영화의 모티브가 사실이라는 것이다. -KBS 긴급 생태보고에 따르면, 2006년 가을 미국 펜실베니아 주를 시작으로 꿀벌의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다고 한다. CCD라고 이름 붙은 꿀벌 실종 괴현상은 미국 전역 35개 주, 전 세계 4개 대륙에서 발생했다. 또한, 홍성태 상지대 교수에 따르면 미 국방부가 작성한 보고서엔 지구 온난화로 인해 20년 안에 대재앙이 닥칠 위험이 경고되어 있다.- 영화는 아인슈타인의 꿀벌 발언(“꿀벌이 없어진다면 인류는 4년 안에 멸종한다”)에 착안하여 전세계 꿀벌이 사라지는 기현상을 다루면서 인류 종말을 경고하고 있다.

사실 꿀벌이 사라지는 것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환경파괴 때문이며,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가들의 탐욕으로 인한 과도한 개발과 산업화-공업화의 결과로 비롯된 대기오염-이다. 공업화는 석탄과 석유를 태워 없애서 에너지를 얻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중심으로 메탄, 이산화황, 질산화물 등의 여러 물질들이 배출되어 마침내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온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홍성태). 공장을 늘리고, 환경을 파괴하며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로비활동을 벌이며, 우리 생활환경을 도심이라는 개발과 산업의 한가운데 던져버린 소수 자본가들의 탐욕이 결국 공동체의 멸망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 중심엔 미국의 거대 기업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공장과 개발을 통한 이윤 창출을 지켜내기 위해 유엔은 물론 미국 정부조차 인정한 생태 위기의 현실을 무시한다. 게다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지구 온난화를 우려하는 비난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반환경운동’이나 ‘반환경 연구’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사람들이 소위 주장하는 것이 지구 온난화가 아닌 ‘지구 냉각화’라는 물타기 수법이다. 빙하가 녹아도 종말이 온다는 것은 극단적 망상일 뿐이며, 오히려 지구의 냉각화가 벌어져 얼어 죽지나 않을지 고민해야 한다는 헛소리다. 2007년 봄 북극 빙하가 녹아 수만 마리의 바다표범이 몰살당한 현실 속에서도 말이다.


이미 온난화로 인한 신종 질병-예컨대 환경 오염병인 아토피의 경우 ‘잘 모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기존에는 없었던 질병들이나 전염병이 창궐하며 앞으로의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치료법이나 백신이 만들어 지기까지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현실이다. 너무나 짧은 시간 안에 이뤄지는 파괴와 변화가 생명체가 적응할 시간을 빼앗으며 대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전망한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박정희식 급속성장과 그로인한 환경파괴의 오명을 뒤집어 쓴 ‘토건국가’임에도 건설회사 사장 출신의 대통령을 뽑아 국토를 반으로 절단낼 대운하 사업이 목전의 칼이 되어 들이닥친 현실이다. 불과 얼마전까지도 우리 국민들 수준이 이정도였다. 당장의 눈에 보이는 개발과 성과물 (예컨대 청계천 복원 공사 같은) 것들에 현혹당하며 그 이미지-시대착오적 개발과 성공신화-에 사로잡혀 경제를 살리겠다는 한마디에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불법적인 화려한 경력들(?)을 무시한 채 덜컥 뽑아버렸으니. 이제야 각성한다 한들 아직 넘어야 할 고통의 산이 높기만 하다.

이제 우리는 개발을 빌미로 표를 얻는 “매표정치”를 끝장내야 한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못살긴 못사는 세상이되, 빈곤이 아닌 너무나 많이 벌어서 못사는, 많이 가진 소수들의 ‘풍족한 못사는 사회’가 아닌가. 이제는 개발이 아닌, '환경'과 '인권'을 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이점에 대해 영화는 한 가지 답을 전한다. 클라이막스에서 남편과 아내의 만남을 통해 서로를 위한 용기와 결단력, (어쩌면 현재 인류를 가르는 가진 자와 못 가진 두 계급의)용서와 화해, 사랑(즉 인류애적 사랑)이라는 가치, 그리고 그러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죽음에 맞서는 '투쟁'에서 문제 해결점을 찾는 것이다.

사실 환경 문제야 말로 전 지구적이며 모든 생명체의 문제가 아닌가. 그런데, 과연 눈앞에 다가온 종말을 가진자들이 인정하고 잘못을 고치려 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경우만 본다면 광우병 쇠고기도 삶아 먹으면 안전하다는 무식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칭 보수의 편에 서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래서인지 영화는 크래딧이 오르기 전 '최후의 경고'를 잊지 않는다. 마침 보수적이라는 말이 나와서 떠오르는 영화가 있으니 올 초에 개봉한 미스트다. 결말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가족이 극도로 보수적인 심판을 받는 영화인 미스트와는 다른 해프닝의 결말은 서로 비교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가족의 가치와 그에 대한 극도로 예민한 강요 같은 부분에서도 두 종말론적 영화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물론, 무식하게 생긴 특수효과 괴물 따위는 나오지 않는 해프닝이 훨씬 뛰어난 ‘심리 스릴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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