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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trend report]/책

약장수와 구렁이 그리고 무좀약


모든 것은 결국 사라져 간다지만 때로는 흘러가는 그 시간 잔혹하도록 무심하다. 보이지도, 곁에 머물 수도 없으나 겹겹이 쌓여가는 지난 시간들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아련하게 간직될 추억일 수도, 남은 생 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견뎌야할 회한일 수도 있는 감정들. 사라진다 해도 잊힐 수 없는 것은 결국 우리의 삶이 깃들어 있기 때문 아닐까.


 
글 박성진/사진 강상훈 김상길 김영경 이주형
ⓒ 이레
 
<모던 스케이프>는 저자가 늦은 봄날의 유년시절 가족들과 함께 창경원 식물원에서 찍은 사진들로 시작한다. 더없이 소중한 개인사의 저장소에는 언제나 근대 건축물들이 있었다.

때문에 "사회의 역사이기 이전에 개인의 낱낱한 기억과 감정이 스며든 일상적 공간으로서, 그것들의 개별적 경험들이 모여 사회의 집단적 기억을 이룬다."는 저자의 말에는 삶과 역사의 관계에 대한 통찰이 스며있다.

식민지의 얼룩이 있다는 이유로 정치적인 명분 속에 제거되어왔던 근대 건축물들. 저자는 그것들과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는 개인들의 삶을 접목시키며 인정과 성찰을 통한 치유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것이다.

거대한 역사의 소유물이 아닌, 개인들의 삶과 함께 시간 속에 기록된 근대 건축물들. 이것들이 세워진 배경이 다소 기형적일지라도 결국 우리가 안고가야 하는 현실의 모습임을 지적하는 저자의 언급은 인간과 삶에 대한 애정과도 맞닿아 있다. 때문에 이 책은 전국의 주요 근대 건축물들을 다루면서도 학문적인 분석보다는 친근하고 감성적인 에세이로 진행된다.

"이리로 오세요. 오뎅이 서비스에요."
"야! 너 자꾸 오뎅 서비스 미리부터 부를 거야!!"
"모야, 앞에까지 와서 얘기한 건데."
"니가 미리 불렀잖아!"
"언니가 그렇게 말하니깐 앞에 왔다 그냥 가잖아! 아 열 받네! 웃기고 있어 진짜."
"아휴, 저 쳐다보는 거 봐라. 아휴 그냥 저 대갈빡을 진짜!"

"애들은 가"라는 약장수의 세대차별적 발언에서부터 포장마차 아주머니들의 걸쭉한 욕지거리까지 동대문 운동장 주변에서는 참 다양한 음성을 채집할 수 있다. (65P-'약장수와 구렁이 그리고 무좀약' 가운데)

서민들의 세상만사로 불야성을 이루던 동대문 운동장과 외할머니 시골집에 내려갈 때마다 들뜬 마음으로 기차를 기다렸다는 서울역사, 부유하는 욕망들이 모여들던 세운상가부터 정동 돌담길의 애달픔까지. 저자와 함께 동행한 사진작가들을 통해 우리는 변화와 발전을 빌미로 재개발 속도가 점점 천박할 지경에 이르고 있는 현시대의 모습을 인지하게 된다. 때문에 각장의 말미에서는 조급증 걸린 막무가내 재개발 주의를 비판하고 역사와 개인사의 공존을 고민하며 발전적 해체를 모색하려는 저자의 고민도 펼쳐진다.

"문제는 해체와 재구축의 방법론이다. 동대문 운동장의 해체가 모든 기억과 흔적을 싹 밀어버리는 '불도저식 철거'인지, 아니면 현재를 바탕으로 과거와 미래까지 포섭할 수 있는 발전적 해체인지가 중요하다." (74P)

동대문 운동장의 경우에도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세워지고 전두환 대통령 시절 우민화의 목적으로 이용되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곳에서도 민중들 나름의 삶이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을 다룬 부분에서는 일본의 실패사례와 비교하며, 막연하게 선진국 사례를 따라하는 국내의 개발풍토 또한 우려한다. 변화란 짧은 시간 눈에 보이는 성과에 집착하기보다 먼 시간을 내다볼 필요도 있다는 것.

세운상가의 재개발 문제 역시 건물이란 단순히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며, 주변의 사회적 상황 또한 읽고 반영해야 함을 저자는 지적한다. 도시 공간은 물론 터를 잡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근대 건축물들과 관련해서 쏟아져 나오는 미술관, 박물관, 전용관, 센터 등의 활용방안에 대해서는 좀 더 날선 비판을 쏟아내기도 한다. 공간에 대한 본질적 고민을 결여한 채, 재개발이 사회 각계가 자신들의 영토 확장을 위한 땅따먹기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건축물의 활용을 논의할 때는 구체적인 용도를 먼저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 공간의 본질적인 성격을 파악하고 각계각층의 이해를 떠나 그곳에서 발생 가능한 행위의 유형과 범주를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특정 계층이나 분야에서 하나의 활용 방안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당위성만을 살펴보는 것은 논의의 폭과 구조를 너무 단순화 시키는 것이다." (106P)

내가 사는 동네는 물론 각 지자체마다 사람들에게 익숙하던 공간이 어느새 개발 대상지가 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개발목적이 일상에서 전혀 필요로 하지도 않던, 공감하기 어려운 건축물을 위한 것인 경우엔 정치인과 관련공무원들을 향해 한숨이 나온다. 도시를 디자인한다면서도 정작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필요는 안중에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은 물론이고, 무분별한 묻지마 개발공약으로 표심을 얻으려는 정치인들을 포함한 관련공무원들에게까지 인본주의적 고민과 성찰의 장을 제공할 것이다. 사진작가들의 작품 감상과 섬세하고 구수한 문학적 필치로 얻게 되는 재미는 덤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