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으로> 각본을 쓰고 <호텔 르완다>의 감독으로 국내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테리 조지의 신작이 나왔습니다. 뉴욕 타임즈가 올해의 작품으로 선정한 소설 <내 생에 가장 슬픈 오후>가 원작인 영화라고 하는군요. 예기치 못한 뺑소니 사고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와 가해자가 마주하게 되면서 서로의 인간성을 시험받는 내용입니다.
앞서 언급한 감독의 전작들을 살펴보면 어떤 특수한 상황에 던져진 인물이 그것에 대응하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테러리스트로 몰려 아버지와 함께 감옥에 갇히거나 인종청소가 벌어지는 살육의 중심부에서 목숨을 걸어야 하거나.
거기엔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위기에 처한 상황들이 모두 끔찍하리만큼 잔혹하군요. <레저베이션 로드>는 그에 비한다면 좀 덜한 상황일까요? 관람하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전개되는 내용이 너무나 가혹하게 흘러갑니다. 살다가 이런 경우도 다 있을까 싶더군요.
아내와 이혼하고 주말에만 아들을 만날 수 있는 변호사 드와이트. 하지만 전 부인은 그에게 매순간 전화를 걸어 아들을 일찍 데려오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아들과 함께 야구장에 있던 드와이트는 경기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신경만 곤두서고 말죠. 토니 스콧 감독의 <더 팬>이라는 영화에도 같은 설정이 나오네요. 이혼한 실직자 아버지(로버트 드니로)가 야구장에서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전처는 잔소리만 늘어놓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경기장에 다녀오면 집에는 밤늦게 도착하니 그 시간까지 아들이 걱정되는 겁니다. 아버지로서는 자기랑 함께 있는데 그런 걱정을 하다니 아무리 이혼한 처지라지만 속상하고 짜증이 나겠죠. 하기야 서로가 만날 때마다 싸우는 사이니까 그럴 만도 하지요. 같은 시각,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에단은 척 보더라도 화목해 보이는 가족들과 즐거운 소풍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두 아버지 중 한 사람의 인생은 실패자처럼 불행해 보이는데 또 한 사람은 너무나도 행복해 보입니다. 그렇게 대조적인 두 사람의 인생이 겹치게 되는 장소는 바로 레저베이션 로드. 주유소에 들른 에단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길가로 나간 아들이 그만...
운명은 대체 얼마만큼 잔인해질 수 있을까
드와이트의 차가 뺑소니를 친 현장에서 에단의 가족은 도로 위에 차갑게 방치된 아들의 시신을 뒤로하고 경찰과 함께 집으로 돌아옵니다. 가해자가 도망친 범죄 현장이라 수사할 필요성이 있다면서 그리된 것이죠. 한 순간에 아들을 잃고 현장에 시신까지 방치해야 된 가족이 깊은 슬픔에 잠긴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반면 우연한 실수로 살인자가 된 드와이트는 아들이 충격을 받을까봐 뺑소니 사실을 숨기려 하고요. 이혼까지 한 그로서는 계속해서 궁지에 몰리는 상황입니다. 한편 에단은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도 그대로 도망쳐버린 살인자를 잡아야겠다면서 직접 나서게 되지요. 그런데 그가 법률 자문을 위해 찾아간 변호사가 놀랍게도 드와이트입니다.
두 사람이 마주하는 장면에서 약간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처음에는 우연이 너무 지나치지 않나 싶었습니다. 왜냐면 에단의 아들 장례식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사람이 바로 드와이트의 전처인데다가 에단의 딸은 그녀에게서 개인지도를 받고 있거든요.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국내 평론가들의 경우엔 우연성이 너무 많다고 점수를 짜게 주기도 했고요. 그런데 영화 속 공간이 워낙 작은 마을인데다가 세상에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법도 없겠다 싶더라고요. 실제로 운명이란 것은 때론 너무나 가혹하게 맞아 떨어질 때가 있다는 점에서 그렇지요.
“창자가 터지고 끊어질 것 같은 이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처럼 고통 받는 사람만이 알 수 있겠죠.”
이것은 영화 속 에단이 뺑소니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모임에 가입하고 메신저로 대화하는 부분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어쩌면 타인의 비극이라는 것은 정말로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실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지요. 어쩌면 저주나 다름없어 보일 정도로 가혹한 운명적 설정들이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인 드와이트까지 압박하며 궁지로 내몰아갑니다. 따라서 테리 조지 감독이 전작들에서 보여준 특수한 상황은 이 영화에서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불행한 사건이 어떻게 각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어떻게 아픔을 극복하고 삶의 비극에 대처하는지와 증오, 복수, 두려움에 대한 모티브를 탐구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한 감정들이 사람들을 어디로 이끄는지 생각하게 하는 영화죠.” -테리 조지
인간의 체온이 있는 드라마
우연성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배우들의 연기를 들 수 있습니다. 감독은 배우들의 과장된 연기를 원하지 않았는지 리허설을 불허하고 즉흥적인 연기로만 영화를 찍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실제 감정처럼 현실적으로 느껴지는데 아마도 평소 배우들의 내공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호아킨 피닉스야 경험 많고 개성 있는 연기파 배우로 이름 난데다 연극에서도 활약하던 마크 러팔로 역시 그에 뒤지지 않죠. <모래와 안개의 집>으로 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제니퍼 코넬리도 마찬가지고요.
또한 주목할 점은 이 영화의 화면 비율입니다. 바로 4:3 플렛(Flat) 버전인데요, 와이드 스크린 버전처럼 옆으로 길게 늘어진 형태와는 다른 것이죠. 오락성을 부각시키며 스케일이나 긴장감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TV 화면에 가까운 비율입니다. 때문에 위, 아래가 채워진 화면에는 더욱 많은 정보가 담기게 되고 배우의 동작과 모습이 확실히 많이 드러나게 되면서 인물에 대한 드라마를 시각적으로도 살려내고 있습니다.
제가 앞서 인물설정이 비슷하다고 언급한 토니 스콧의 <더 팬>같은 경우, 장르가 전형적인 헐리웃 스릴러이기 때문에 와이드 스크린으로 긴장감을 팽팽히 살리고 있어 대조적이죠.
게다가 예술 영화 전용관에서 관람했기 때문인지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가지 불을 켜지 않더군요. 덕분에 음악을 들으며 여운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음악 감독이 바로 <흐르는 강물처럼>과 <아름다운 비행>의 마크 아이샴 이랍니다. 그래미 어워즈나 에미상은 물론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까지 석권하며 명성을 굳혀온 그는 이 영화에서도 깊은 울림이 있는 섬세한 음악을 들려줍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드라마가 살아있는 괜찮은 작품입니다만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별다른 극적인 사건도 없이 뺑소니 사고를 통한 가족들의 아픔이라는 내용이 지루할까봐 안보는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 사회를 보면 오락성이나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들이 너무나 획일적인 기준으로 자리 잡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들어요.
사회를 지배하는 물질 만능과 소비주의에 영합해서 순간의 쾌감을 좇는 영화들이 스크린을 독과점할 때 이런 영화들은 불과 한 두 개 상영관에서만 보여 지는 현실. 과연 영화가 문화로서 지니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문화가 가지는 다양성을 무시하고 지배적인 상업 논리로 획일화되는 풍토에서 반기를 드는 이런 저항 영화들이 앞으로도 꾸준하게 나왔으면 싶습니다.
뱀발-영화와 공간, 뜨악한 경험
작품성과 출연배우가 흥미롭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독립영화인지 개봉관이 딱 두 곳이더군요. 지난 번 소개해드린 <24 시티>보다 하나 더 많은 개봉관입니다. 이번에도 영화를 보기위해 무려 두 시간 정도를 투자해서 극장으로 갔는데요. 헉헉 힘들어서 목이 말라 극장이 위치한 이화여대 ECC 안에서 정수기를 찾았는데 물 컵이 없는 겁니다. 깜짝 놀랐어요. 정수기에 대고 손이나 씻으라는 건가? 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는데 아무래도 일회용 컵이 환경 파괴를 하니까 그런가보다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 앞으로는 물병이나 컵을 가지고 다녀야겠다는 기특한 생각도 해봤고요.
그런데 말이죠. 정수기의 일회용 컵은 안 되고 테이크아웃이나 편의점 일회용 컵들은 상관없다는 걸까요?
영화가 상영된 이화여대 ECC 내부 극장 주변 환경은 물질적인 소비문화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커피도 팔고 음식도 팔고 편의점에서 헬스장까지 여러 가지 돈 내는 것은 많더군요. 그러한 상점들이 차지하지 않은 텅 빈 공간은 지하 광장이나 다름없지만 그곳에 인간을 위한 평등한 광장의 개념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외국 건축가가 디자인했다는 건물의 외형은 멋지지만 내부에서는 삭막한 느낌만을 주로 받았죠. 쉴 수 있는 공간도 의자 따위만 덩그러니 그것도 가게 주변에만.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문화의 위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 내 공간이 그런 식으로 소비주의를 조장한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안에 자리 잡은 극장에서는 문화 다양성을 외치며 지배적인 소비문화에 저항하려는 작품을 상영하고 있다는 점. 뭔가 아이러니 합니다. 휴먼 드라마를 보러갔다가 공간과의 대립을 통해 오히려 씁쓸함만 안고 돌아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