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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trend report]/영화

런던 콜걸 벨 Vs 이리나 팜-성노동, 자본주의 속의 여성

The Secret Diary of A Call Girl (2007)

Irina Palm (2007)


처음으로 취재를 나갔던 이 년 전, 성매매 업소 두 곳을 둘러보고 아주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한곳은 당시 우후죽순 생겨나던 일종의 전화방이었는데 성인 피씨방을 가장하여 윤락을 하고 있었다. 사장은 사십대 중반 정도의 중후한 풍채로 얼굴엔 개기름이 흐르고, 뱃살만큼이나 두터운 가면을 쓴 채 함부로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 부류였다. 해서 취재가 상당히 어려웠는데 우연하게도 급여를 지급받지 못한 성판매 여성 둘이 나타나 항의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사장은 당황하면서도 한 달이나 밀린 급여를 곧 주겠다면서 또 다시 그 여자들을 일하도록 내모는 것이 아닌가. 듣자하니 급여도 애초에 말한 것보다 훨씬 적은 액수를 주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두 여성이 얼핏 봐도 십대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사장은 이런 업소를 다른 지역에도 하나 더 운영 중이라고 했다. 더 취재를 하고 싶었는데 갈수록 불법과 착취가 들어나니 부담을 느낀 사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그냥 나오고 말았다. 그 가게에서 약 백여 미터 근방에는 지하철 번화가와 대형 백화점, 관공서가 들어서 있었다.


황당함을 뒤로하고 다른 업소로 향했다. 이곳은 회원제 클럽으로서 미리 약속을 하고 찾아갔다. 간판도 없이 외진 곳의 조그만 빌딩에 위치해서 찾기가 약간 어려웠다. 두꺼운 철문 앞에서 인터폰을 통해 예약사항이나 회원신분을 확인한 후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은 자신을 매니저라고 소개했다. 패션 스타일로 보아 조폭이 아닌가 의심됐는데 (속칭 깍두기 머리에 검은 정장의 우악스러운 차림만을 조폭이라고 상상한다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상당히 세련됐으며,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아가씨들과도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듯 했다. 영업형태의 차이 때문인지 먼저 찾은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는 둘째 치더라도, 업주의 수준이 확 달랐다. 대부분 20대 정도로 보이는 아가씨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직업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첫 인상이 그랬다는 거고, 실상은 나도 잘 모르지만 평소 성매매 여성에 대해 가지는 착취 받는 피해자라는 인식과 충돌되는 당당한 직업여성이라는 느낌에 당황한 것이다.


또한 매니저와의 대화를 통해 지역 견찰과의 공생관계임을 알게 됐다. 예를 들어 단속을 나오기 전에 미리 연락을 준다거나 하는 경우이다. 당시에 요즘 세상에도 그러냐고 물었더니 날 보고 순진하다고 하던 그의 웃음이 선하다. 하긴 엄정한 법집행을 한다는 어모씨 (53세, 견찰 고위간부)의 동생도 성매매 업소 운영에 관계하는 마당이니. 사회의 파수꾼을 자처한다는 언론, 자칭 1등 신문사 ‘조선일보’의 코리아나 호텔 사우나에서도 마사지를 가장한 유사성행위, 이른바 퇴폐영업을 하고 있다질 않나. 그래, 쥐새끼 소유 건물에도 성매매 업소가 있고 화끈한 밤문화를 즐기는 성폭력 의원들도 목에 힘주는 사회인데.


하지만 당시 업소 두 곳을 직접보고 느낀 감정은 굉장히 복잡했다.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면서도 터부시되던 것을 외면하고 지내던 무지가 어느 순간 깨지면서 느껴지는 당혹과 혼란이랄까.


“이제까지 성판매 여성들은 극단적으로 형상화된 담론 안에 존재한다. 유혹자, 폭력의 희생자 또는 노동하는 주체(성노동자, sex worker)로 이야기되고 구획된 규정들은 성판매 여성을 특정한 표식에 가두어 왔다. 특히 ‘헤픈 여성들이 성매매를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는 지배적인 인식은 성매매를 옹호하고 성판매 여성을 비난하거나 성산업에의 폭력과 착취의 문제를 외면하는 논리로 사용되어 왔다. 이렇듯 성판매자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여성은 가난한 가족의 희생자이거나 성폭력, 인신매매와 감금, 착취의 피해자가 되어야만 그나마 그 비난을 면할 수 있었다. (성매매, 경계를 두드리는 소수자의 물음들 - 원미혜 , 그린비)”


처음 업소의 경우 착취의 현장을 분명히 목격했지만 내심 선입견이 있었다. 바로 십대로서 그런 행위를 한다는, 불량한 이미지가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생각은 곧 바뀌었다. 타인의 삶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처지에 편견을 가지고 비난하는 건 오만한 짓이니까. 성노동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기 전에 결국은 그들을 그런 상황에 내몰아버린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탓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 성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온 주제에 위선의 가면을 쓰는 국가와 제도권이 얼마나 무능하고 무책임한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현실이 이럴진대 성노동 행위 자체를 찬성, 반대의 이분법을 통해 따지는 것도 사실 우스운 노릇이다. 성매매 업소를 운영하면서 ‘공직자 성윤리 어디 갔나?’ 같은 기사를 게재하는 위선적인 언론도 사라져야 한다. 그런 언론들이 조장하는 편견 속에 희생 되는 것은 결국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힘없는 여성이 아닌가. 어쩌면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성노동을 선택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착취나 편견으로 인한 불이익 등의 폭력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런던 콜걸 벨 Vs 이리나 팜

그녀들은 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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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콜걸 벨>

최근 ‘런던 콜걸 벨 (The Secret Diary of A Call Girl)’이라는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섹스를 좋아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콜걸이 되었다고 자신을 규정한다. 전형적인 ‘헤픈 여성’의 등장은 드라마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 사고와 편견을 조장하는지 보여준다. 그녀는 대개 파티나 멋진 호텔 등지에서 근사하게 차려입고 신사적인 엘리트들과 스타일 팍팍 살리면서 매력을 뽐낸다. 근데 내가 알기로 현실은 구질구질하다. 일단 국내의 경우. 올 초에 개봉한 추격자엔 한국식 콜걸들이 등장한다. 그녀들은 모텔이나 여관 등지로 출장을 가고 전혀 모르는 타인을 만나는 행위를 통해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다. 때론 수준 이하의 인격 파탄자 (흔히 진상이라 불리우는)손님도 겪게 되고 몰래 카메라도 찍힌다. 실제로 이들의 성노동을 허락 없이 찍은 파렴치한 동영상이 유포되고 있다. 그리고 정말 안타깝게도 유영철 같은 살인범과 조우하기도 한다. 물론 외국에도 이런 사례가 많다. 프리랜서 범죄 프로파일러인 브랜트 터비는 성노동자가 가장 많은 납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그 외의 학대와 강력 범죄에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생리적인 대상으로 전락하여 인권 침해와 범죄에 노출된 채 위험과 스트레스를 견디며 어렵게 돈을 번다는 대부분의 현실은 ‘런던 콜걸 벨’ 따위의 드라마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벨 같은 여자가 지구상에 하나도 없으리란 법은 없다. 또한 짧은 시간의 드라마에서 시청률까지 생각하려니 흥미 위주로 내용이 흐를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때문에 차라리 영화, ‘이리나 팜’이 보여주는 장면들이 다수의 현실과 가깝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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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나 팜>

‘이리나 팜’의 내용은 간단하다. 희귀병에 걸린 손자의 수술경비 마련을 위해 일자리를 찾던 할머니가 실수로 ‘섹시클럽’이라는 성인 업소의 면접을 보게 되고 그곳에서 고액의 대딸방 일을 제안 받는다.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남성의 욕구를 손으로 해결해 주는 일. 물론 손님은 상대편의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손의 감촉만으로 취직이 된 것이다. 평생 한 남자의 아내로서 가정 일만 해오다 늙어버려 직업소개소에서도 거절당하는 형편이니 내키지 않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야말로 전통적인 주부상을 고수해오다 노년에 과부가 되어 대책이 없는 꼴. 자본주의 사회가 특히 여성과 노년에게 얼마나 잔인한지가 그대로 반영된다. 더군다나 철저히 남성의 입장만 반영하는 성문화의 한가운데. 그녀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 비난이 두려워 가족은 물론 친구들에게도 비밀로 한 채 일을 시작한다. 

영화는 영국과 독일,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등 유럽 5개국의 배우와 스태프들이 참여했고 2007년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여 심사위원 최고 평점과 함께 장편부문 상을 받았다. 감독은 CF로 경력을 쌓았는데, 이미지와 무드를 잘 살리는 그럴듯한 장면들로 매끄럽게 영화를 진행시켜 나간다. 자본가이면서 세상에 염증을 느끼는 외로운 중년으로 분한 미키 마뇰로비치의 표정 연기가 뛰어나며, 명가수 마리안느 페이스 풀의 잔잔하고도 섬세한 감정 연기가 가슴을 울린다. 또한 각각의 캐릭터가 입체감을 가지고 사회의 모순, 희생, 위선 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성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체제의 희생양인 아들은 사회가 주입한 편견에 찌들어 있으며, 절친했던 친구 사이엔 비밀과 분노가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남성주의적 사고를 벗어나 비난 속에서도 엄연히 존재하는 산업 속에 소외되어 있는 여성의 존재와 목소리를 그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이 미덕인 영화. 체제 안에서 수동적이어야만 했던 주인공이 능동적인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개척한다는 결말 또한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 원미혜님 글은 '경계의 차이 사이 틈새(그린비 2007)'라는 책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