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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trend report]/영화

디아볼릭(Les Diaboliques, 1955)


야수는 죽어야 한다. 끌로드 샤브롤 감독의 1969년 작품 ‘야수의 최후 (Que La Bete Meure, 1969)’에는 너무도 악랄한 인격의 남자가 등장하는데, 주변사람 모두 내심 그가 죽기를 바란다. 하지만 너무나 포악한 야수같은 인물이라 모두 억눌린 채 끙끙 앓기만 할 뿐. 그들 중 누군가는 자신들을 구원해줄 ‘영웅’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 듯 보인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디아볼릭 (Diabolique, Les Diaboliques, 1955)’에서도 죽여야 될 대상으로서 악랄한 존재가 등장하니, 그는 학교의 교장으로서 아이들은 물론 직원과 교사들의 인격을 짓밟으며 강압적인 언행을 일삼는다. 또한 어처구니없는 것은 학교의 여교사 두 명을 상대로 공공연한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으니, 한 명은 그의 아내요, 또 다른 한 명은 그의 정부다.


이게 다가 아니다. 원래 학교와 모든 재산은 아내의 것. 그녀를 '소유'했다고 착각하는 교장은 열등감의 뒤틀린 표현인지 항상 폭행을 일삼는다. 이쯤 되면 관객은 영화 속의 악당이 응징 받기를 바란다. 지속적인 폭력의 상처가 얼마나 무서운지, 실제로 많은 피학대자들이 은밀한 살인 판타지를 꿈꾼다 (데이비드 버스). 실패에 따른 위험 때문에 현실화 되기 힘든 살인 판타지의 가장 완벽한 실행은 아마도 하이스미스의 리플리 시리즈일 것이다.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를 두고 따지기 전에 인간은 누구나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다. 또한 현실에서는 힘과 권력이 얼마나 많은 힘없는 자들을 억압하며 살인을 저지르는가. 어쩌면 복수나 응징 또한 공공의 양심에 기대는 행위로 정당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예를 들면 혁명이 그러하다.


작품 속에서도 거창한 사회적 혁명이 아닌, 개인 간의 불평등과, 지배 착취 구조를 뒤엎을 반란적 혁명이 모의되기 시작한다. 아내와 정부가 연대하여 교장 살해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다. 저마다 성격이 확실한 등장인물들이 사건을 겪으면서 보여주는 변화와 심리묘사가 일품. 또한 교장이 살해된 후 전개되는 부분은, 스릴러이면서도 오컬트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것이 독특한 매력을 형성한다. 마치 히치콕의 레베카에서 생성된 인물들 간의 갈등과 유사한데, 등장인물들은 이미 죽은 교장의 영향을 받으며 불안에 떨게 된다. 특히 수영장과 관련된 장면 같은, 드라마적인 화면 구성 속에 스릴이 흐르는 독특한 분위기가 매력인 작품인데, 또 하나의 매력을 들자면 두 여인 간에 흐르는 페미니즘적 애증 관계다. 서로 경쟁자였던 아내와 정부는, 폭력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정하고 동지가 된 순간부터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여성적인 스타일의 아내와 부치 스타일의 정부. 계획을 통해 가까워진 두 여인은 잠도 같이 자게 된다. 하지만 작품을 이끌어가던 여성 중심적 에너지는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 헤어지는 쪽으로 전개가 흘러간다. 또한 결말에서 이뤄지는 심판은 이들을 '요망한 것들'로 규정하고 파멸을 선언한다. 두 여인의 관계에 대한 진실이 폭로되는 부분은 연대된 여성 에너지의 부정을 통해 모든 것을 추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매카시즘적 광기와 결합한 당시 사회의 폐쇄성이 헐리웃에서 상영해야 했던 프랑스 영화에까지 미친 영향일까? 단순한 비극적 게이 로맨스의 파멸이 아닌 능지처참 수준의 파국이 펼쳐지니.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예정된 죽음 (사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희생자가 복수를 했다고 가해자로 둔갑되어 심판을 받아야 하는 답답한 현실과, 당시 사회에 흐르던 특유의 불합리한 보수성. 감독이 안쓰러웠던지 마지막에 반전 하나를 더 마련해 놓는다. ‘누군가’ 살아 있다는 아이의 중얼거림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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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볼릭
(Les Diaboliques, 1955)
| 스릴러

감독 : 앙리 조르주 클루조
출연 : 시몬느 시뇨레, 베라 클루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