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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 ~2010 >/사회

35만원 짜리 마루타 알바에 나선 사람들

* 이 글은 인터넷 언론 <오마이 뉴스>에 송고되었습니다


하늘에서 피가 내렸다. 아니 비가 내렸다. 전날 하루 종일 피를 뽑았으니 하늘에서라도 내려 부족한 것을 채워주길 바란 건 아닐까. 새벽 일찍 일어났지만 내리는 빗속에 숙소 주변의 수목들을 구경할 시간도 없이 민기(가명)는 차에 올라야 했다.

3일 동안 진행되는 생체실험 일정 중 마지막 하루를 남겨두고 수련회 숙소에서 밤을 보낸 민기와 일행 수십 명을 태운 버스가 출발 시동을 걸었다. 버스는 빗속을 뚫고 생체실험이 진행될 병원으로 향해간다.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마음을 짓누르지만 갑갑한 통제와 불편한 실험에서 곧 해방될 거란 생각에 민기는 편안한 자세로 잠시 눈을 감는다. 시판될 약의 생체반응을 측정하는 실험 피험자로 지원한 민기는 빈곤 가정에서 자랐다. 질기게 들러붙는 가난 때문에 실험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부작용에 대한 경고를 들은 후 약을 먹고 하루 종일 피를 뽑으면 35만 원가량의 돈이 쥐어진다.

2박 3일로 진행된 일정의 마지막 날 아침 피험자들의 피를 뽑으며 종료된 실험. 규제를 벗어났으니 홀가분하게 보여야할 민기의 표정은 그러나 가볍지 못하다. 아침에 잠시 버스에서 졸던 때는 아니었는데 막상 실험이 끝나니 또 표정이 무거워 진다. 아니 어두워진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술집에서 알바하려다가 아빠 술 마시는 거 생각나서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기분 좆같아져서요."

▲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피험자

민기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흔히 말하는 개가 된다. 문제는 술을 안 마시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는 것. 민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정이 심하던 아버지는 임신한 민기 어머니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동네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며 허리띠를 풀어 구타하곤 했다고 한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축복받은 생명이라곤 느껴보지 못한 민기의 몸 여기저기엔 칼과 담뱃불로 자해를 한 상처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고 내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으니까. 다들 말해봤자 못 알아들어요. 나처럼 살아보질 않아서. 그렇잖아요, 이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인 기분인데 버려진 기분. 이런 상처들이 생기면 그나마 그런 고통은 잊게 되니까요."

중학생 시절 일부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담배빵과 칼빵...그땐 왠지 특별하고 멋있어 보이고 싶기 때문에 철없이 벌이는 행동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그런 친구들의 표정은 늘 어두웠던 것 같다. 일부러 소리 내어 웃거나 떠들지 않으면 그늘이 드리워져 조숙한 느낌을 풍기던 얼굴들. 반면 부모가 잘살아서 용돈도 풍족하게 받는 애들까지 그런 문화를 따르곤 했으니 참 한심하기도 하지만. 누가 알랴. 사회도 학교도 아무런 꿈을 주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지는 못한 듯 보이는데.

언젠가 한 여름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옆 차선에 정차한 택시의 열려진 창문 안으로 승객의 팔을 보고 기겁한 적이 있다. 도무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촘촘히 자리 잡은 칼빵들이 팔뚝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내가 쳐다보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택시에 앉아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려는 사이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타인의 상처를 외면한 것일까. 아니면 험악해 보이는 그와 얽히기 싫어서?

사실 나도 칼빵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내 몸에도 그런 흔적이 남아있다. 때문에 생살을 찢으며 피를 흘리는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픈지, 아물기 까지는 또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알고 있다. 그런 칼빵은 물론 담배빵까지 자해의 흔적이 가득한 사람들을 보면 한편에 자리 잡은 순탄치 못한 인생사를 짐작하게도 되지만, 혐오스럽기도 하고 험악한 분위기에 주눅 들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행동을 하면서 슬픔과 아픔을 잊어야만 했던 악에 받힌 느낌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다가설 수 없는 타인의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혐오를 보내는 것은 아닐까.

"짧게 살고 싶어요."

실험에 지원했던 사람들을 태운 버스가 병원을 벗어나 교통이 편리한 도심 전철역에 정차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내려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고 인도에서 벗어나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허공에 담배 연기로 길게 한숨을 그리며 민기가 짧게 살고 싶다고 한 것을 끝으로 헤어졌다. 2박 3일을 두 번 반복한 총 6일 간의 만남이었다.

민기가 참여한 것은 '생동성 실험'이라고 흔히 불리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대학생들 사이에서 고수익 알바로 떠올랐으나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피까지 뽑아야 하는 '한국판 허삼관 매혈기'로 일컬어지던 그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피를 뽑아 판다는 것이 아니다. '매혈'이란 것은 엄밀히 말하면 헌혈로 끼니를 해결하는 상황을 일컬어야 할 것이다. 나도 해본 적이 있는데 진짜 할 짓이 못된다. 싸구려 햄버거 하나에 엄청난 피를 뽑아 주니까. 그러나 '생동성 알바'는 단순한 헌혈이 아니라 약을 먹고 그에 따른 몸의 반응을 실험 데이터로 제공하는 것이다. 때문에 마루타 알바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제는 이 생동성 실험에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막 성인이 된 청년들부터 실업자와 직장인들까지 몰리고 있다. 민기가 참여한 실험에서 그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돈이 궁한 대학생들이 신체를 연구 자료로 제공한다던 것은 이제 옛말이다. 츄리닝이나 캐쥬얼 차림의 청년들부터 양복을 입은 30대들까지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그들 모두 가난하기 때문에 부작용에 대한 경고를 듣고 약을 먹는 실험에 응했다는 것이다.

▲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제 막 성인이 된 청년부터 대학생, 실업자, 직장인 등 다양한 부류였다.

"삼일 동안 출장을 내고 참여했습니다. 직장은 있지만..." (직장인)

"직장은 있어요. 근데 아시다시피 요즘...도저히 생활이 안돼요...물가는 너무 오르고 있고..." (직장인)

"뭘 그런 걸 물어요...깝깝하지...그냥 (굶어) 죽느니 나온 거죠." (실업상태)

약물이 가진 특허권 기간이 끝나면 경쟁관계에 놓인 제약회사는 카피 약을 만들어 팔 수 있다. 한 예로서 유명한 두통약의 특허기간이 끝나자 우후죽순 비슷한 효과를 가진 제품들이 등장한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약들을 시중에 판매하기 위해선 기존의 제품과 성분 및 효과에서 동일함을 증명하는 실험이 필요하다. 물론 이미 시판되는 약을 카피했기 때문에 인체에 해가 없다고 주장되어 지고 있다. 그러나 부작용이 있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또한 시판을 앞둔 약은 아직은 대중적으로 검증받지 못한 제품이다. 그것을 돈을 받고 신체를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실험하는 것이 '생동성 알바'다.

▲ 실험이 시작되면 피를 뽑기 위해 혈관에 원통형 '카테터'를 박아 넣고 고정 시킨다.

실험이 시작되면 기존의 제품과 비교를 해야 하기 때문에 두 번에 걸친 약물 투여와 채혈이 이뤄진다. 보통 한 번에 2~3일의 기간 동안 합숙을 하며 통제된 상황 속에 놓인 사람들은 지루한 시간을 견뎌낸다. 식사와 수분섭취는 물론 화장실까지 규제를 받으며 앉아만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 앉아서 돈 버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지원한 청년들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집이 부자인데 호기심에 참여했다는 부류는 찾아 볼 수 없었다.

▲ A군과 B군으로 분류해서 진행되는 실험. 탁자 위에 놓인 채혈판들. 피험자가 된 사람들은 이름 대신 번호를 부여받는다. 실험 기간 동안 사람들은 이름이 아닌 번호로 호명된다.

실험이 시작되면 발작을 일으키거나 쓰러지는 사람도 생겨난다. 실제로 민기가 참여한 실험에서 몇 명은 실험이 시작되고 문제가 생겨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견뎌낸 사람들은 돈을 받았다. 미래에 팔리기 위해 실험중인 약물을 일반인들 보다 먼저 체험한 대가로서. 실험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동안 짧게 살고 싶다던 민기는 물론 그 누구도 돈을 벌었다고 기뻐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마다 우중충한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