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ewstrend report]/생활·문화

야수(2006) - 부패한 기관들, 더러운 사회

‘야수’라는 한국 느와르가 개봉했을 때, 그 때깔과 후까시에도 불구하고 하품하는 관객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영화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리라. 누군가는 극중 장도영 형사 같은 캐릭터의 비현실성이나 후반 총격씬의 허무맹랑함을 들며 비난했지만, 이 영화가 역사적 실화도 아닐뿐더러 타큐멘터리는 아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수’라는 영화에 담겨진 한국 사회 권력의 모습은 그 자체로 다큐를 방불케 했으니, 누군가 하품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뉴스만 보면 쉽게 접하는 모습을 극장에서 또 다시 보다니. 비록 마초적 응징이 가해진다고는 하지만. 사실 부패한 공권력, 법과 정의의 좌절과 비극은 현실에서는 피해망상에 가까워야 한다. 요즘의 헐리웃 영화의 경우 악당들은 최후에 검거되고 법과 정의가 바로서면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고전인 워렌 비티 주연의 ‘암살단’ 같은 정치 스릴러의 경우엔 정의가 패배하는 결말이 현실에 대한 무기력을 조장하는 피해망상이라는 비난도 받았지 않나? 그런데 ‘야수’같은 세계관이나 결말이 관객의 공감을 얻는 경우라면, 그 사회는 과연 살만한 사회인가? 공권력이 필요한가? 심히 의문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사실 아직까지 범인이 검거되지 않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통하여 독재 군사 정권과, 그 개가 되어 충성을 다 바치던 공권력의 무능함을 ‘살인의 추억’이 고발 했을 때, 나는 더 이상 그런 후진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믿었다. ‘박하사탕’에서 보여준 야만의 기술이 이제는 사라졌겠지 싶었다. 그러나, 치안의 부재로 어린 아이들이 납치되고 살해되는 세상에서, 시나리오 작가를 지망한다는 어느 강력팀장의 무용담을 통해, 현장 수사관의 폭력이 얼마나 인권 침해적인지 절감하면서, 나는 급우울 모드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견찰의 무능함과 반 인권적 행동은 끊임없이 계속 되어 온 셈인데, 우리가 신경을 덜 쓰거나 언론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가끔씩 지나가던 행인을 용의자로 착각해 폭행하거나, 탈옥한 수감자의 동거녀를 찾아가 성폭행하는 경우가 아니고선 그 수많은 인권 유린의 현장은 주목받지 못했다. 예를 들어, 2년 여간의 기나긴 투쟁 끝에 환경 파괴적이며 비효율적인 핵 시설 반대를 외치던 부안 군민들이 어린 전견들의 방패와 몽둥이에 피 흘리고, 심지어 성폭력까지 당할 때. 당시 언론은 숨죽이기에 바빴다 (고길섶,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 만일 당시 부안 사태를 제대로 보도해 주는 언론이 있었다면 나는 노무현 탄핵 반대를 외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지역 이기주의라는 비난을 들어가며 외롭게 싸우던 부안 군민들이 지역의 환경을 힘겹게 지켜내는 동안 노무현 정부는 83억이 넘는 거액의 혈세를 언론홍보에 투입했다. 사실 한국 정부는 핵 자본에 대한 굉장히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다. 97년 대만이 서해를 경유해서 핵폐기물 운송을 시도할 때, 정부는 사고가 날 경우 동북아 전 해역이 죽음의 바다가 될 것이라면서 극렬하게 반대했다. 또한 핵 발전과 폐기물 문제는 그 위험성과 현실적인 지속불가능 때문에 미국에서도 거의 포기 상태다. 독일에서는 수많은 국민들이 핵 발전소 시설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결국 재생 가능한 미래 에너지 개발이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부안의 군민들이 핵 반대 시위를 시작하자 관련 산업으로 이득을 얻는 세력들은 혐오 시설에 반대하는 ‘지역 이기주의’라는 비난을 쏟아내며 이들을 고립시켜갔던 것이다. 결국 2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의 투쟁을 통해 군민들이 승리를 거뒀으나, 폭력 견찰에 의한 만행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으며, 독재와 탄압을 대중 양심으로 응징하려던 사람들의 저항은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라면서 경찰 계엄이 선포되기도 했었다.


생각해 본다면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소가 웃을 소리다. 공권력은 민생을 위해 시민의 발아래 봉사하라고 있는 것이다. 어디 감히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라는 개념상실의 주둥이를 놀리나? 시민을 향한 공권력의 도전이라는 표현이 맞다. 어쨌거나, 언론이 다뤄주지 않는 사이, 제 2의 광주 항쟁과 다름없는 고립과 폭압을 견뎌낸 군민들은 결국 승리했다. 그렇게 민중의 위대함은 증명 되었으나 전견이 해체되지 않아 공권력의 주제넘은 개념상실과 폭력은 계속 되었다. 결국, 2005년 12월 FTA 항의 시위를 벌이던 농민인 전용철·홍덕표 두 시민이 견찰의 폭력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노무현 참여정부 당시 허준영 경찰청장 재임 기간 벌어진 사건이었다 (민중의 소리 기사 참조). 당시 일반인들은 FTA가 뭔지, 신자유주의가 뭔지, 지금보다는 잘 알지 못했다. 오히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국제 정세에 더 밝고 앞서가고 있었다. 그들은 정부의 희망 없는 농업 정책으로 시름하면서도, 시민의 권리와 민주주의를 외치다 견찰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미국산 쇠고기라는 실질적인 문제가 눈앞에 닥치자 농민이 아닌 일반 직장인이나 학생, 주부 등 전 국민이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촛불을 들며 저항하기 시작했고, 지 버릇 남 못주는 견찰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한 채, 또 다시 패륜적인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 그 과정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해 어디론가 실려 가는 것을 봤다는 단순 목격담을 어느 신문기자가 게시판에 올렸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다는 심정으로 일명 ‘사망설’을 조사하려 할 때, 견찰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기자를 구속했다. 돈 2~5만원과 마일리지에 패륜과 불법 연행을 자행하는 자들이 있지도 않은 명분과 명예를 따지기 전에, 우선 자신들의 역사를 돌아보고 반성해야 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 어쩌면, 2008년 민주주의 위기는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닐 것이다.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순사질을 하던 이들이 해방 후 목숨 부지를 걱정하던 그 때, 또 다시 미군정에 의한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청산되지 못한 야만성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은 아닐까? 시대와 정권을 달리하면서도 권력을 이룬 견찰은 부정부패와 결탁하고, 조폭들과 공생했으며,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들을 구타와 고문, 살인으로 억눌렀다. 어렵게 일궈낸 대통령 직선제라는 것. 즉 선거라는 것은 결국 민주주의를 향한 시작이었을 뿐이다. 어둠과 불의가 세상을 위협할 때, 우리의 생활 자체가 끝없는 저항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특히나 2006년 작품인 야수라는 영화의 세계관이 더욱 피부에 와 닿는 요즘. 법과 정의를 상실한 견찰의 모습에서 우리는 현실의 장도영과 오진우를 기다린다. 또한, 영화도 어차피 현실의 반영이거늘, 사회를 좀먹는 부패 견찰의 존재로 인해 아직도 우리는 ‘정당한 피해망상’을 스크린에서 보아야 할지 모른다.


야수 (Running Wild, 2005) 액션, 느와르 | 2006.01.12 | 124분 | 한국

감독 김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