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trend report]/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에 화이부동의 길을 찾다

굿럭쿄야 2009. 2. 23. 12:58

센트럴 파크에 우주에서 날아온 괴물체가 착륙합니다. 거대한 구의 형태를 하고 있는 그 물체 안에서 외계 생명체가 걸어 나오죠. 자신을 ‘클라투’라고 소개한 그는 세계 정상들과의 회담을 요청합니다. 생명이 살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별들 가운데 특히 지구의 환경이 위험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방부 장관은 클라투가 인류의 문명을 멸망시킬 제국주의적 존재라고 생각하며 경계합니다.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에게 정부가 해를 가할 것을 알게 된 과학자 ‘헬렌’의 도움으로 탈출한 클라투. 둘은 정부의 추적을 피해 함께 도망치게 되죠.

 

이 과정에서 헬렌은 지구의 환경파괴를 막기 위한 클라투의 인류학살 계획을 알게 되고 남아있는 시간 동안 그를 설득시켜 간다는 내용입니다. 원작은 냉전시대 전쟁의 위험을 경고했지만 상황이 바뀐 지금은 산업화와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문제를 경고합니다.

 

그런데 사실 너무나도 유명한 가이아 이론이 떠올라 진부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인간이 바이러스처럼 지구를 좀먹고 있으니 청소하러 왔다는 외계인의 이야기. 그다지 신선하다고 볼 수는 없겠죠. 하지만 미 국방부가 작성한 보고서엔 이십 년 안에 온난화로 인한 대재앙이 닥칠 가능성이 경고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냥 재미로 따지기엔 심각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얽힌 대자본이 녹색혁명의 물결에 합류한다면 해결 될 수 있는 문제이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네요. 그런데 당장의 이익을 버리면서까지 석유 재벌을 비롯한 거대 자본이 완전히 친환경 구조로 돌아서지는 않고 있죠.

 

때문인지 이 영화는 오락적 재미보다는 드라마성에 집중합니다. 물론 전체 플롯에는 추적과 구출 등 모험적인 요소들이 양념처럼 자리 잡지만 주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늙은 현자의 이미지를 가진 노교수를 찾아가 칠판의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으로 집약되어 나타나기도 하고요. 원작에도 있는 장면입니다.

 

사실 장면 하나엔 상당량의 텍스트가 바탕이 됩니다. 아무리 짧게 스쳐가는 몇 초의 장면이라도 영화 전체를 함축할 수가 있죠. 그런 면에서 칠판에 공식을 적으며 답을 구하는 장면을 집어넣은 것은 이 영화의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작 또한 인류의 불화와 전쟁을 막을 방법을 구하는 과정이 중요하게 다뤄지거든요. 물론 결말에서 평화와 희망을 설교하는 낯 뜨거운 장면이 연출되긴 하지만 리메이크 작엔 그런 것이 없군요. 말 대신 영상을 통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원작보다 뛰어납니다.

 

리메이크를 보며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클라투가 탈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원작에선 병원에 있다가 갑자기 사라지더니 거리를 걷고 있죠. 그 부분을 볼 때마다 순간이동이나 초능력도 아닌데 좀 무성의하다 싶은 불만족이 들었습니다만 리메이크가 괜찮은 아이디어로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인류를 싹쓸이 하러 왔다는 외계인이 어째서 최후에 마음을 바꿨을까요?

 

SF가 던지는 동양적 메시지-화이부동(和而不同)

 

사실 클라투가 초기엔 국방장관의 우려대로 제국주의적 모습을 보이긴 합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있는데 ‘화’가 아닌 ‘동’을 하고 있는 셈이죠. 동이란 말 그대로 하나의 패권을 내세우는 자기 동일성의 원리입니다. 타인의 존재를 인정은 하지만 결국엔 자신의 주관을 내세우며 군림하는 것이죠. 미국이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군림한 역사도 그렇고 자본으로 세계를 장악하며 쿠바를 고립시킨 것 또한 그러한 배타적 대립 논리가 바탕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영화의 초반은 다른 존재의 대립을 통해 서로의 이해를 관철시키려는 갈등이 두드러지게 전개 됩니다. 이러한 관계가 지속된다면 지능과 기술 등에서 훨씬 우월한 외계인 클라투가 승리하고 인류가 멸망할 수밖에 없지요.

 

 
  
인류를 명망시키는 동시에 지구의 생명체들을 대피시킬 이중적 의미를 지니는 구. 이것은 완전함과 동시에 화합의 상징이기도 하다. 존재의 복잡성을 반영하는 것.
ⓒ 20세기 폭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후반부와 결말에서 클라투가 180도 변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헬렌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존재의 차이와 다양성을 알게 되고, 어떠한 가능성을 발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클라투는 지구에 도착해 헬렌과 그의 아들 등을 만나면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맨 처음 만난 군인들은 자신에게 총을 발사하고 실험실에 가둬버리지만 헬렌은 그를 탈출시키고 이후에도 계속 선한 행동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이때부터 클라투는 인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서서히 바꾸기 시작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곧 ‘동’이 아닌 화의 논리로 변환함을 뜻합니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존재의 파괴적인 자기 관철이 아닌 평화로운 이해와 공존을 통한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때문에 SF인 이 영화는 미래지향적인 메시지까지 완벽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지난날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동’의 역사에서 새로운 세상을 위한 ‘화’의 역사로 전환하는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마음을 열고 다가서는 관계의 지속성입니다.

 

맹자의 이양역지(以羊易之)

 

마침 맹자 양혜왕편 7장에는 재선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재나라 선왕이 당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자니까 구실아치가 황소 한 마리를 질질 끌며 지나가고 있었다. 선왕이 그것을 보고 책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구실아치가 대답하였다. “오늘이 제삿날이어서 소를 죽여 새로 만든 종에 제사 지내려고 합니다.” 선왕은 소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애처로웠던지 이렇게 말했다.

 

“소를 놓아주어라. 그 불쌍한 모습을 차마 볼 수 없구나. 죄도 없는데 사지로 끌고 가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구실아치가 물었다. “소를 놓아 주면 제사 지내는 일은 그만두는 것입니까?” “그만둘 수야 있겠느냐” 선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대신 양으로 바꾸도록 하라.”

 

그런데 소를 양으로 바꾼 것을 안 백성들은 선왕이 큰 것이 아까워 작은 것으로 바꿨다고 수군대지요. 게다가 따지고 보면 양도 불쌍한데. 여기에 대해서 맹자는 이런 설명을 내놓습니다. 왕이 소를 불쌍히 여긴 것은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계인 클라투는 과학자 헬렌과 일종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이것을 지속함으로서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된다.
ⓒ 20세기 폭스

 

어떠한 존재와 마주봄으로서 형성되는 관계를 잘 설명한 부분입니다. 하물며 클라투와 헬렌은 그 긴 시간 동안 그러한 마주봄의 관계를 지속하고 서로에 대해서 인식하게 되었으니 결국 외계인이 인간에 대한 희망을 품을만하지요. 사실 클라투는 이미 오래 전에 지구상에서 인간의 유전 정보를 채취하고 정보를 얻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한데도 만남을 통한 앎의 과정이 없었기에 존재에 대한 인식은 완전하지 못했다고 봐야합니다. 기록만으로는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존재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요.

 

예전에 신영복 선생께서도 지적한 부분입니다만 사회라는 것은 인간들의 만남과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대립되는 사회를 보면 지속적인 관계가 아닌 자기중심적인 고립과 단절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대통령이 서민이었다면 과연 강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칠 수 있었을까요? 북한과 정상회담이라도 한번 했더라면 남북관계가 이렇게까지 경색됐을까요? 항상 피부를 맞대고 살아가는 이웃이었다면 경찰들이 시민을 구타할 수 있을까요. 지휘관이 실제로 철거민들과 생활을 하며 용역 깡패들에게 얻어 터졌더라면 살인을 불러온 작전을 승인했을까요?

 

현대물리학이 증명한 것처럼 물질은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모이는 사회는 말할 것도 없지요. 인간관계의 단절로 인하여 올바른 가치와 목표를 공유하지 못하고 황폐화된 사회는 붕괴될 수 있습니다. 굳이 외계인이 나타나지 않아도 말이죠.


*예전에 오마이 뉴스에 같이 올라간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