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전역하고 오랜만에 광화문 시내로 나왔을 때의 일이다. 휴가를 제외하면 장시간 고립된 오지에서 지내다가 시내를 걸어가니 숨이 턱턱 막혔다. 차와 사람도 너무 많아 정신이 없는 와중에 어떤 사람들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차도를 사이에 둔 양쪽 인도에서 반전과 무기 확산 금지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로 외국의 인권개선을 요구하는 모습이 너무나 생경하고 이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당시의 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열렬히 신봉하고 있었다. 군대에서 안보관과 전술 브리핑으로 상까지 받았던 나의 눈에 비친 그들은 정말 뜬구름 잡는 몽상가들이었다. '지금 한반도 상황이 어떤데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만 걸어가는 사람들을 붙잡아대는 그들과 마주치지 않고선 목적지에 도달할 방법이 없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가급적 마주치치 않기 위해 걸음을 빨리하는 나의 앞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긴 생머리에 하얀 셔츠를 입은 여자 분이었다.
바빠서 가보겠다는 나를 붙잡고 잠시만 시간을 내어달라는 간절한 부탁에 당황스러워 나도 모르게 전시된 사진들 앞으로 끌려가 설명을 들어야 했다. '사이비 종교라면 성질이라도 부릴 텐데...' 단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전쟁과 무력분쟁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진속의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너무나 본인의 고통처럼 설명하는 여자 분의 태도에서 의아함이 느껴졌다. '뭐야? 지나친 감수성인가?'
어떤 단체가 이리도 열정적일까 궁금해서 살펴보니 오래전 읽은 세계 정치론이라는 책에 언급된 NGO 가운데 하나였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외국의 학자들이 언급한 단체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활동하는 것을 직접 보니 신기해서였다. 하지만 그 여자 분, 밝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제가 웃기세요?"
멋쩍고 미안하고 또 외국 학자들이 인정하는 유명단체가 하는 일은 뭘까 궁금해서 결국 후원회원에 가입신청을 해버렸다. 그날부터 앰네스티 한국 지부와 나 사이엔 보이지 않는 끈이 형성됐다. 매달 배달되는 소식지와 더불어 회원들에게는 주어지는 임무. 그것은 전 세계, 특히나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정부에 의해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거나 희생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탄원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황당했다. 어떻게 이까짓 엽서 한 장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됐다. 그런 엽서나 편지들이 한 장, 또 한 장씩 전 세계에서 모아져 권력을 남용하는 잘못된 정부에 배달 될 때 폭탄보다도 무서운 힘을 발휘한 다는 것을. 실제로 전 세계에 퍼져있는 앰네스티 회원들의 탄원이 모아져 억울하게 갇히거나 고문을 당하던 사람들이 구출되는 수많은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명박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얼마 후, 사람들이 촛불을 드는 것을 봤다. 과거 효순이와 미선이 추모 집회나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태 때도 사람들이 촛불을 드는 것을 봤다. 그러나 나는 새삼스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촛불은 앰네스티의 상징이다. 1961년 자유를 외치다 체포된 두 청년들의 기사를 읽고 단체를 세우기로 결심한 변호사 피터 베넨슨과 초창기 회원들. 그들이 촛불을 상징으로 선택한 까닭은 다음과 같은 격언 때문이다.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촛불을 켜라."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 촛불을 밝힌 광장에서 나는 대한민국의 희망을 봤다. 정의를 바라고 어둠에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국민들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자부심을 느꼈다. 아무리 사회구조가 잘못되고 정치가 썩어도 이런 사람들과 함께라면 이 땅에서 미래를 꿈꿔도 좋다는 사실을. 그러나 정부는 사람들의 열망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그들은 과거 수많은 국민들의 피와 고통을 담보로 권력을 이어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해군 천안함이 갑자기 침몰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의무를 다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 희생돼도 권력자들은 사건을 감추고 있다. 그들에 빌붙어 돈을 끌어 모으는 일부 언론 재벌들은 사건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 바쁘다. 상식 이하의 추론들로 여론을 형성하려 시도하고 북한과의 대결을 선동한다.
해안 기지에서 군복무를 했던 내가 보기에 이번 사건은 북한과 관련이 희박하다. 상황을 보면 거의 제로에 가깝다. 국방부가 공개한 TOD 화면도 의도적인 편집으로 상황을 감추고 있다. 더군다나 사고 해역의 상황을 단순 기록한 TOD 화면이 군사기밀을 유출할 일은 없어 보인다. 이번 참사에 전 국민적인 관심이 쏠려있는데도 진실을 감추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은 희생자가 되지 말지어다. 가해자가 되지 말지어다.
그 무엇보다도, 방관자가 되지 말지어다." - 홀로코스트 박물관, 워싱턴 D.C.
억울하게 실종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밝혀내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이미 많은 전역자들과 네티즌들이 일부 언론의 물 타기에 맞서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경찰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들고 있는 촛불을 입으로 불어서 끌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진실을 찾는다. 안타까운 목숨들이 걸려있는 사건을 덮으려는 어둠에 맞서 우리가 촛불을 드는 것은 당연하다. 실종자들은 잊혀 지지 않을 것이며 우리 가슴 속의 촛불도 꺼질 수 없기 때문이다.